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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코로나 시대의 교회

이사쿠 2020. 9. 2. 00:47
개인적으로 좋게 읽은 글. 카톡으로 받은 글이라 출처가 명확하지 않지만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님 설교 내용이라고 함.

+ 2020.09.05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확인해보았더니, 경동교회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설교문이었다.
설교일은 2020.08.23, 설교제목은 "우리가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
자세한 내용은 www.kdchurch.or.kr/Board/Detail/38/117454에서 확인 가능하다.

1.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예고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승하고 있는 마태복음서에만,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후에,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petros)다. 나는 이 반석(petra)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6,17-19)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반석’은 그 위에 건물을 짓는 넓고 펀펀하고, 견고한 기초가 되는 돌이나 바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성전의 반석을 지하세계에 이르는 출입문을 봉한 것으로 이해했고, 거기에서부터 그 밖의 다른 세상이 주위에 펼쳐진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하늘에 이르는 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베드로라는 반석을 죽음의 문들도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입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말은 베드로가 하늘나라 수문장(守門將)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하늘나라 관리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계명을 구속력이 있게 하거나, 또는 구속력이 없도록 해석하는 가르침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서의 이 말씀은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도적 수위권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가 수위권을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주교들은 로마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시리아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에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에는 콘스탄티노플도 포함된 모두 5개의 총대주교좌가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 4개의 총대주교좌는 정교회 소속이고, 로마 주교좌만 가톨릭교회가 점유하게 되었는데,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당한 곳이라면서 수위권을 주장했고, 베드로를 계승하는 교황에게 최고의 권한을 부여하는 교리를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입장은 다릅니다. 정교회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주교가 교회의 반석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는 분명히 영예로운 자리지만, 모든 주교는 그 사도적 권리에 있어 서로 동등하고, 로마의 주교는 모든 교회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지요.
 
교회마다 베드로에 대한 평가가 다르지만, 적어도 베드로가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였다는 점에서(고전 15,5), 열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뚜렷한 존재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영도자였고,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까지 사실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했습니다(갈 2,7-9). 그런 점에서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실력자였다는 것만은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고, 하늘나라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마 16,17-19), 로마 교회 주교의 수위권에 대한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하려는 것은 왜,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인정받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도 아니고(갈 2,7-9), 다혈질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답을 찾기 전에, 우리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첫 번째 메시아 수난과 부활 예고 직후, 자기에게 대드는 베드로에게 ‘사탄’, ‘걸림돌’이라고 하면서,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신 것에 주목하려고 합니다(마 16,23).
 
마태는 베드로를 한 편으로는 ‘반석’(페트라)으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걸림돌’(스칸달론)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강한 성격이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에, 교회의 반석이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모순되는 두 단어에서 베드로의 이중적 성격만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상징되는 교회의 이중적인 성격, 교회의 모순을 곧바로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분명하나, 그 반석은 흔들리는 반석, 걸림돌이었던 것이지요.
 
어찌 교회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역사적 종교, 신앙공동체는 이중적입니다. 현실의 종교가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아니 창시자의 가르침을 스스로 배신해 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주장하지만,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집단, 아니 세상보다 더 못한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모든 형태의 권력과 탐욕을 초월해 있다고 하면서도, 대부분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탐욕을 충족시켜온 것이 현실 종교의 얼룩진 역사입니다. 원수 사랑을 외치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박멸하려는 증오에 사로잡힌 집단,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을 탐하는 집단,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아니라 ‘살인성신’(殺仁成身)하는 단체,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 수많은 종파와 종단으로 분열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이지요.
 
2. 종교의 흔들리는 정체성, 예수님 시대, 성전과 제의 중심의 유대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막 11,15-18; 마 21,12-13; 눅 19,45-46)이 되었고, ‘예배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요 2,16)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장사꾼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요 2,15).
그것은 고위층 사제집단의 허가를 받아야만 성전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던 상인들과 고위층 사제집단의 유착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데나리온)를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성전세를 유대인 화폐(세켈)로만 내게 함으로써 고위층 사제집단이 환차익을 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으로 성전체제가 폭로되고, 경제적 이익을 침해당한 대제사장들과 고위층 율법학자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지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 행동을 본 그들은 예수를 없앨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막 11,18).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이나 희생제사 그 자체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으로서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은 성전이 성전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제사가 형식화된 것, 성직의 권력화, 고위사제집단의 부정부패와 관계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가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12,1). 죽은 동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그것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몸’입니다. 감각적이고,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인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이지요. 남성이건 여성이건, 건강한 몸이건 아픈 몸이건, 장애(障礙)가 있건 없건,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몸’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어떤 것이란,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함, 준비함, 그에게 바침, 제공된 것을 의미하고, 제물이란 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주님의 은혜로 구별된 우리 몸’을 내드리는 것이지, 다만 ‘마음’만 드리거나, 다만 ‘영적으로’, 다만 ‘생각으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몸과 맘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예배는 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과 귀만 바쁜 구경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내 드리는 것이지요. 구약성서 신명기 법전은 예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신 10,12-13; 신 11,13; 신 13,3; 신 30,2; 신 30,6; 신 30,10)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본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배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만나고, 자기가 섬김을 받으러 오거나, 단지 구경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예배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서 보는 지루한 구경일 뿐이지요.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비대면 온라인 예배가 계속되면서 -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 걱정되는 것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자칫 예배가 다만 ‘보는 것’, 온 몸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눈과 귀’만 움직이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비드-19’ 시대가 꼭 부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공간이나 특정한 성전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합당한 예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그렇습니다. 우리 몸 자체가 성전이고(고전 3,16-17; 고전 6,19),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고, 합당한 예배(롬 12,1)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롬 12,2),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저마다 받은 신령한 선물, 곧 은사로 알고, 일상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하는 것’(롬 12,5-9)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특정한 공간에 격리된 특정한 시간에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온 몸으로, 우리의 온 몸을 통하여, 우리의 온 몸과 함께 드려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주일이라는 구별된 날만이 아니라, 매일이 예배드리는 날이고, 예배 시간만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곧 종교적 행위는 윤리, 생활 속 실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악을 행할 수 없고,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저주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예배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3.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의 구체적인 모습들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전 12,13; 행 10,35; 고후 7,1; 계 14,7).
이집트 왕이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명령한 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출 1,17). 이 두 산파가 아니었으면, 수많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이집트 최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용기와 지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구한 두 산파들에게 복을 내려,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고 합니다(출 1,21).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불안과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겁(怯)이 많은 소심함이나 우유부단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에서 오는 자유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지요.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마 10,28)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코비드-19’의 갑작스런 확산으로 ‘온라인 예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감염되는 것을 막고,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로써,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힘 들기는 하지만, 불평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교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커가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마치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습니다. 모임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교회를 떠나는 신도들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헌금 감소와 재정악화도 문제이지만, 예배가 더 이상 섬김이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모일 수 있었을 때에도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보기만 하는 교인들은 언제나 있었지요. 그러나 비대면 온라인 예배가 장기화되면, 유튜브나 텔레비전 보듯이, 예배도 단지 보는, 그래서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아니라, 눈과 귀로 드리는 죽은 제사가 될까봐 걱정됩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장기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교회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신도수와 헌금이 줄어들고, 미자립 임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고, 목사 실업자들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보는, 감염병의 진원지로 보는 사회적 시선도 시간이 간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지금부터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미래의 교회’가 어떤 교회일지를 생각하고, 변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미래의 교회’는 분명히 ‘비종교화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일 것입니다. 특정한 공간(예배당)과 구별된 시간(주일 아침)에만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인, 다시 말해 ‘생활신앙’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코비드-19 팬데믹’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종교인’,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책임적인 신앙인을 요청할 것입니다. ‘코비드-19 팬데믹’ 시대는 마치 유대전쟁 후, 나라와 성전을 상실한 하나님 백성이 길고 긴 ‘디아스포라’ 시대로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없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몸이 곧 성전인 종교, 제사는 없으나, 안식일 지키기와 율법 공부가 곧 예배인 이른바 ‘종교 없는 종교의 시대’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하는 시대’, ‘세속화 시대’에 들어선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생활’하기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시대의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모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도 수와 헌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은 그러나, ‘교회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재정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거기에 맞춰 살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이 어려워지면, 오히려 ‘신앙생활’은 더 진지해지고, 더 자율적이고, 더 능동적이고, 더 책임적이고, 더 본질적이고, 더 실존적이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약해지면, ‘신앙생활’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교회생활’이 어려워지면, ‘신앙생활’은 더 기뻐질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라는 보이는 죽은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교회의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교회’를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한숨 쉬면서 ‘교회의 미래’를 걱정만 하지 않고, ‘미래의 교회’가 되기 위해 스스로 변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미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생활’에서 ‘신앙생활’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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